축산업/정육상식

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1)

오늘도힘차게 2019. 11. 15.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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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1)



조선 후기,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인하여 왕권이 약화되자 매관매직 등 부정부패가 횡행하였고,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차지한 이들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 했으므로 국가재정은 파탄나고, 수탈의 대상이었던 농민들은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토는 피폐화되고, 빈번한 자연재해와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여 농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하게 되자 농민들은 농촌을 떠났고, 전국 각지에서 민란(民亂)까지 발생하여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동학농민운동


또한, 대외적으로는 식민지 확보를 목표로 하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帝國主義的) 침략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조선은 지배층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쇄국정책(鎖國政策)을 실시하여 국제적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선이 격동기를 겪고 있는 동안 일찍이 서구문물을 수용하였던 일본은 열강의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시작으로 1905년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침탈한 후 1910년 한일병합조약(韓日合倂条約)까지 체결하여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일병합조약 전권위임장


이후 조선시대까지 고유한 형태를 유지하던 재래돼지는 일제강점기 기간동안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수탈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1906년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였고, 이는 조선의 전통 및 자연환경에 따른 자원을 보전시키기 보다는 일본식 체계를 강압적으로 보급하였습니다.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권업모범장은 이름 그대로 일본식 기술이 모범이라는 것이며, 수탈의 대상에는 가축도 포함되었으므로 조선의 재래돼지도 수탈의 대상이었습니다.


조선축산협회, “조선축산의 개요”, 1927


당시 권업모범장이 조사한 권업모범장 성적요람 등에 따르면 “조선의 재래돈은 체질이 강건하고 번식력이 강하다. 체격은 극히 왜소하여 6~7관(22.5~26.25kg)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성숙이 늦고 비만성이 결핍하여 경제가치돈 중 최열등하여 이를 개량하는 것이 극히 긴요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권업모범장 성적요람(勸業模範場成績要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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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목적에 비추어 조선의 재래돼지는 체구가 너무 작고, 성장속도가 매우 느려 부적합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일본은 소형종이었던 재래돼지의 생산능력을 향상시킨다는 미명하에 일제강점기 기간동안 재래돼지와 외래종인 버크셔종(Berkshire)요크셔종(Yorkshire)을 무분별하게 교배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버크셔종(Berkshire)

요크셔종(Yorkshire)


물론 당시 조선의 재래돼지가 비경제적인 가축으로 평가되고 있긴 하였으나, 재래돼지의 특징들이 기록된 조선농업편람(朝鮮農業便覽)조선농업론(朝鮮農業論) 등의 과거 문헌들에 따르면 “재래돼지는 피모가 흑색으로 체격은 왜소하고 체중은 22.5~32.5kg이며, 머리는 길고 뾰족하며, 배는 심히 하수되어 있고, 만숙에다 비만성이 없으나 체질은 강건하고, 번식력도 양호하며, 특히 육미는 조선 사람들의 입맛에 적합한 것 같다.”고 하여 조선인의 입맛에는 맞았는 평가만으로도 보존가치가 충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선농업편람(朝鮮農業便覽)


일본은 1903년 요크셔(Yorkshire)종을, 1905년에는 버크셔(Berkshire)을 도입하여 재래돼지와의 교배로 개량을 시도하였으며, 경남 사천지역과 경기의 강화지역을 개량돈 번식지로 지정하고, 각 도(道)에 약 1,300두를 배부하였습니다.



이렇게 배부된 개량돼지는 초기엔 별로 조선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재래돼지보다 체격이 크다보니 사료도 많이 먹었고, 재래돼지와 달리 지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농업론에 따라면 재래돼지는 “돼지고기는 비교적 맛있으므로 육질이 지방질에 비교하여 많다”고 평가한 반면 개량돼지는 “지방질이 많아서 고기가 맛있지 않다”라고 평가하였고, “근래에 버크셔와 요크셔 종이 다수 수입되어 교배종을 생산하였으나, 비등 양종의 순혈종이 일반적이기에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비교적 다량의 사료가 들고 또 지방질이 많아서 고기가 맛있지 않은 까닭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농업론(朝鮮農業論)


하지만, 개량돼지의 체격이 커서 수율(收率) 측면에서 유리하고, 가격도 높았기 때문에 점차 농가측에서도 선호하게 되어 점차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연도

사육두수(마리)

돼지가격(圓)

1913

761,186

8.50(一頭)

1914

757,803

5.25(一頭)

1916

780.077

재래종 5.17 (一頭)

개량종10.22 (一頭)

1918

923,979

재래종 8.87(一頭)

개량종 18.99(一頭)

1919

962,985

재래종 11.24(一頭)

개량종 28.09(一頭)


당시 작성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朝鮮總督府統計年報)에는 개량돼지의 가격이 재래돼지의 가격보다 2배 이상 높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총독부 통계연보(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27년 동아일보에 따르면 “조선의 양돈가는 737,000여 호에 달하고, 돼지수요는 수퇘지가 477,000여 두이며, 암퇘지는 672,000여 두로 합계 150만 여두를 초과하였고, 최근 돼지를 많이 기르게 된 것은 돼지 2마리를 기르면 소 1마리 사육에 필요한 비료가 생산된다”며 당시 양돈이 고소득을 얻을 수 있는 유망한 부업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927년 3월 19일 동아일보


다만, 이러한 현상들과 달리 교통이 불편하고 정보교환이 불리하였던 일부 산간지대와 섬지방 등에서는 개량돼지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재래돼지를 계속적으로 사육하였으므로, 사육지역의 지명을 따라 경기도 강화도 지방의 강화돈(江華豚), 경상북도 김천 지례지방의 지례돈(智禮豚), 경상남도 사천지방의 사천돈(泗川豚), 전라북도 정읍지방의 정읍돈(井邑豚), 제주 지역의 제주돈(濟州豚) 등의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각각 독특한 형태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김천 지례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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