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업/정육상식

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5편 근세시대-1)

오늘도힘차게 2019. 11. 1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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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5편 근세시대-1)



고려 후기,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등장한 친몽골 성향의 권문세족(權門世族)은 음서제도(蔭敍制度)를 통하여 신분을 세습하고, 대토지를 겸병(兼幷)하면서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등 그 횡포가 극에 달하였고, 불교의 세속화에 따른 폐단과 북으로는 홍건적,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으로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권문세족(權門世族)


이에 당시 최고의 무장이었던 이성계(李成桂)는 권문세족과 불교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였던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후 유교(儒敎)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하고, 숭유억불(崇儒抑佛)과 숭농억상(崇農抑商)정책을 펼쳤습니다.


이성계(李成桂)


그러다보니 농사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돼지는 여전히 비경제적인 가축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따라서, 제사(祭祀) 또는 사신접대(使臣接待) 등에 제한적인 용도에 활용하기 위하여 소규모로 목축이 이루어졌습니다.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윤5월 8일 계해 1번째 기사에 따르면 “황제가 내관(內官) 구아(狗兒)를 불러 말하기를, ‘조선인(朝鮮人)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광록시(光祿寺)로 하여금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토록 하라’(帝召內官狗兒曰: ‘朝鮮人不食豬肉, 令光祿寺以牛羊肉供給)”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성종(成宗) 19년(1488) 명(明)나라의 사신 동월(董越)이 조선 사행을 마친 뒤 조선의 산천과 풍속, 인정과 물정을 기록한 조선부(朝鮮賦)에 따르면 “조선 주민들은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고(所不可曉者, 家不豢豕)”, “관청에만 양과 돼지가 있어, 향음례를 할 때에 간혹 그것을 사용한다(官府乃有羊豕, 鄉飲時或用之)”라고 기록하여 당시 조선의 돼지 목축규모와 용도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윤5월 8일 계해 1번째 기사


돼지가 제사용 등에 희생(犧牲)용으로 사용되는 가축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대접받지 못하였던 또다른 이유는 웅취(雄臭)때문이었습니다.


웅취는 수컷 웅(雄)냄새 취(臭)가 더해진 말로서, 수퇘지에서 나는 특유의 불쾌한 냄새를 의미하는데요.  


웅취(雄臭)


수퇘지가 자라면서 안드로스테논(androstenone)스카톨(Skatol)이라는 물질이 분비되면 돼지고기에서 자극적인 암모니아냄새가 나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꺼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웅취의 원인


이에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 8월 11일 계축 2번째 기사에 따르면 “예조에서 계하기를, ‘지난 경자년에 사신으로 온 예부 낭중 조양(趙亮)이 받들어 가지고 온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사제 희생(賜祭犧牲)과 계묘년에 예부 낭중 양선(楊善)이 받들어 가지고 온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사제 희생은 모두 거세(去勢)한 양과 돼지를 썼으므로, 그들을 접대하던 의정부 참찬 황희(黃喜)가 묻기를, ‘희생을 어찌하여 거세한 것을 쓰느냐’고 하니, 양선이 대답하기를, ‘숫 짐승은 비리기도 하고 살지고 크지도 않으므로, 무릇 원구단(圓丘壇)이나 종사(宗社)의 제사에는 우생(牛牲) 외에는 모두 거세한 것을 쓴다.’ 하고, 겸하여 희생을 선택하여 미리 기르는 법을 더 자세하게 말하였고, 그 후에 판서 신상(申商)이 사신으로 갔을 때에 예부에 질문하기를, ‘제사에 거세한 희생을 쓰는 것이 「몸뚱이가 완전한 것을 전(牷)이라」고 한다는 뜻에 어긋나지 아니한가.’ 하니, 


세종실록(世宗實錄)


주사(主事) 진준(陳俊)이 대답하기를, ‘지체(支體)에 갖추지 못한 것이 있으면 전(牷)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결하고 살지고 기름지게 하려고 거세하는데 무엇이 완전하지 않다고 혐의할 수 있겠는가. 숫놈 같은 것은 비단 제향이나 어선(御膳)에 쓰지 아니할 뿐 아니라, 보통 사람도 역시 먹지 아니한다.’ 하오니, 중조(中朝)의 제도에 따라, 크고 작은 제향에 쓰는 양이나 돼지는 모두 다 거세한 것을 미리 기르게 하고, 그 거세한 불알은 《문공가례(文公家禮)》의 양복(楊復)의 주석에 ‘무릇 제사지내는 고기에 오려 내고 그 나머지는 가죽이나 털 같은 것까지도 밟아 더럽혀서 부정하게 하지 말라’는 제도에 따라 즉시 묻어버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禮曹啓: "去庚子年使臣禮部郞中趙亮齎來恭靖大王賜祭犧牲及癸卯年禮部郞中楊善齎來太宗恭定大王賜祭犧牲, 皆用羊豕。 館伴議政府參贊黃喜問: ‘犧牲何用騸?’ 楊善答云: ‘雄牲有腥不肥大, 故凡圓丘、宗社之祭, 牛牲外皆用騸。’ 兼言擇牲預養之法尤詳。 其後判書申商入朝質問禮部曰: ‘祭用騸牲, 無乃乖於體完曰牷之義乎?’ 主事陳俊答云: ‘支體有虧, 謂之不牷可也。 欲精潔肥膏作騸, 何嫌於不完? 若雄牲非獨不用於祭享與御膳, 庶人亦不食。’ 乞依中朝之制, 大小祭享羊豕, 竝皆作騸預養, 其騸割之餘, 依《文公家禮》 楊復附註: ‘凡祭肉臠割之餘、皮毛之氣, 勿令殘穢褻慢。’ 之制, 須卽埋瘞。" 從之)"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 8월 11일 계축 2번째기사


즉, 제사에 희생용으로 이용되는 돼지는 원래 흠이 없어야 했음에도 거세한 돼지를 이용하는 것은 거세가 숫퇘지의 웅취를 없애고, 육질을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거세를 하여 돼지를 더욱 정결하고 기름지게 하여 올리는 것이 제사의 목적에 더욱 부합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1월 18일 임진 3번째 기사에 따르면 “요동(遼東)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염소와 돼지를 사서 가져오게 하고, 또 통사(通事)로 하여금 먹여 기르고 불까는[作騸] 법을 배워 익히게 하여 그대로 분예빈시(分禮賓寺 : 목축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이후 사축서(司畜署)로 개칭) 별좌(別坐)를 삼아서 그 먹여기르는 것을 감독하게 하고, 


사축서(司畜署)를 겸하였던 호조(戶曹)


또 전에 기르던 제사 소용의 중국 돼지는 토종과 잡종이 되어 몸이 작고 살찌지 않아서 제향에 합당하지 아니오니, 함께 사 가지고 오게 하사이다(議政府據戶曹呈啓: "每令入遼東者買羊猪而來。 且使通事傳習喂養作騸之法, 仍差爲分禮賓寺別坐監養。 且前所畜祭牲唐猪, 雜於鄕種, 矮小不肥, 不合祭享, 竝令買來。" 從之)”라고 하여 세종은 수시로 중국어를 잘하는 통역관을 중국에 보내 돼지 사육기술과 더불어 거세의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고, 목축(牧畜)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였던 분예빈시를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1월 18일 임진 3번째기사


하지만, 세종의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돼지에 대한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세종실록 99권, 세종 25년 3월 4일 기미 1번째 기사를 보면 “세종이 ‘궐내 여러 곳에서 쓸 것은 하루에 돼지 한 마리씩을 쓰게 하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니, 도승지 조서강(趙瑞康)이 호가(扈駕)한 대신들과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사오니, 보통 사람도 그러하온데 어찌 궐내에서 쓸 수가 있겠습니까?(其闕內諸處所需每一日用猪一口何如?" 都承旨趙瑞康, 與扈駕宰樞議啓曰: "我國之人, 不嗜猪肉, 凡人尙然, 豈可用於闕內乎? 遠道姑停進上, 近道則不可停之)”라고 하여 일반 백성들도 좋아하지 돼지고기를 어찌 궐내에서 쓸 수 있겠냐며 궐내 돼지고기의 사용을 반대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실록 99권, 세종 25년 3월 4일 기미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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