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업/정육상식

초량 돼지갈비의 유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오늘도힘차게 2019. 11. 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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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 돼지갈비의 유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勃發)하면서 북한군이 진격함에 따라 서울·경기 지역의  민간인들은 대규모로 대구, 부산 등의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인력의 수적인 우세를 앞세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UN 연합군과 국군이 서울 이남지역(以南地域)까지 철수하게 되면서 이북지역의 민간인들과 이남지역의 민간인들이 대규모로 부산 등으로 피난하게 되었습니다.


1.4 후퇴시 피란행렬


전쟁 직전 약 40만 명이었던 부산의 인구는 피난민이 모여들면서 약 90만 명으로 급증하게 되자 주택난, 식량난, 전력난, 식수난 등이 발생하였고, 구호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기 때문에 그나마 물자와 일거리를 구할 수 있었던 항구에 인접한 부산의 초량동 일대에서 노숙하거나 경사진 산비탈에 판자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1960년 초량동 피난민 집단 거주지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외국으로부터 각종 원조물자가 부산항을 통하여 들어오게 되어 하역작업이 많아지게 되자 이들은 주야 교대로 근무하며 화물을 나르는 험한 중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952년 부산 부두에서 긴급 구호미를 하역하는 모습


하지만, 고된 하역작업이 끝나고 나면 경사진 산비탈에 위치한 집까지 오르기엔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였으므로,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자연스럽게 식당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빠르고 간단하게 허기를 채워주고, 별다른 반찬이 필요없었던 돼지국밥과 빈대떡 등이 팔렸으나, 고된 노동에 지쳐 무언가 특별한 뜯을거리가 필요했던 이들에게 몇몇 식당들이 주위 도축장에서 도축하고 고기가 조금 붙어 있었던 돼지갈비를 구워팔기 시작하였고, 저렴하면서 영양도 많았던 돼지갈비가 인기를 끌자 골목을 중심으로 식당들이 늘어나 돼지갈비골목이 형성되었습니다.



초량 돼지갈비골목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루면서 250m 남짓한 골목에 38개의 돼지갈비식당이 들어설 정도로 번창하였습니다.


초량 돼지갈비 골목


이 지역의 돼지갈비는 다른 지역의 돼지갈비보다 고기의 두께가 두툼하고, 간장으로 양념을 하여서 짜지도 맵지도 시지도 쓰지도 달지도 않은, 조화를 잘 이룬 맛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량 돼지갈비 손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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