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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 돼지족발의 유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오늘도힘차게 2019. 11. 2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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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 돼지족발의 유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조선시대 한양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던 장충동은 서울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군영(軍營)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던 곳으로서, 1900년 9월, 고종(高宗)이 을미사변(乙未事變)·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순사(殉死)한 충신·열사를 기리기 위한 장충단(奬忠壇)을 설치하면서 장충동(奬忠洞)이란 지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한양경성도(漢陽京城圖) 남소영 위치


당시 군병과 유민, 걸인이 거주하는 빈민촌이기도 하였던 장충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이후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의도로 장충단을 위락공원으로 만들고, 박문사(博文寺)육탄3용사 동상을 건립하여 조선 항일의 상징이었던 장충단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일제시대 당시 박문사(博文寺)


또한,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장충동과 신당동 일대에 부유한 조선인과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주택(文化住宅)을 조성하기도 하였습니다.


1934년 장충동과 신당동의 무학(舞鶴)주택지 견본


해방 이후 장충단 일대는 국립묘지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나, 동작동에 국립묘지가 조성되어 장충단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사기진작이라는 명목하에 장충단 일대에 육군체육관을 건립하였고, 각종 경기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955년 육군체육관 개관식


장충동 일대는 문화주택단지가 있는 부유촌도 있었으나, 개발이 되지 않아 낙후된 빈민촌도 여전하였으며, 육군체육관의 경기를 관람하려는 인파가 점차 늘게 되자 1957년 평안북도 출신의 전숙렬씨가 “함경도집”이라는 선술집을 차리고 빈대떡과 만두 등의 이북식 음식을 팔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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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숙렬 씨


그러다 손님들이 술안주를 찾게 되자 어린 시절 평안도 출신의 어머니가 삶아 준 족발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을 더듬어 남대문시장에서 돼지족발을 사다가 된장을 풀어 족발요리를 하게 된 것이 장충동 족발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차츰 조리법이 개선되어 물과 조선간장·양파·생강 등의 양념 간장물에 족발을 삶게 되었고, 그 달콤한 냄새는 주당들을 끌기 충분하여 금새 입소문이 돌아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자 일손이 모자랐던 전숙렬씨는 친구와 동업하게 되었으나, 약 3년만에 친구는 독립하여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안도족발집”을 개업하였다고 합니다.


평안도족발집


그러던 중 육군체육관은 군 당국의 횡령사건으로 인하여 운영주체가 서울시로 이관되고, 서울시는 1960년 3월 16일에 착공하여 약 2년 9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국내 최초의 실내경기장인 장충체육관을 탄생시켰습니다.


1960년 장충체육관 신축공사


당시 장충체육관은 1979년 4월 잠실체육관이 준공되기 전까지 다목적 체육관으로서의 기능을 해오며 한국 실내스포츠의 유일한 메카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며, 수많은 인파를 장충동으로 모여들게 하였습니다.


1963년 장충체육관 개관식


그 결과, 장충동의 족발은 점차 주변에 족발집들이 줄 지어 생기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족발거리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장충동 족발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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