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업/정육상식

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8편 1950년대-1)

오늘도힘차게 2019. 11. 22.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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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8편 1950년대-1)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35년간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정을 거쳐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당시 정치적·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수립되었던 정부는 국민경제의 재건을 위하여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였고, 식량증산을 위한 방안으로 축산업 장려정책을 추진하여 돼지의 사육두수는 점차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성환축산시험장에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하지만, 정부의 다양한 노력이 무색하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생하게 되면서 1949년 52만 5천 두까지 이르렀던 돼지사육두수는 1950년 15만 6천 두로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약 만 3년 1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그 결과 국토는 초토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향을 잃고 떠도는 수많은 사상자와 실향민들이 양산되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한국군측의 피해규모는 총 634,067명, 유엔군은 545,908명, 북한군측은 801,000명, 중공군 1,234,000명 등 총 322만 명의 피해가 발생하였고, 남한 민간인은 사망과 행방불명 등 총 990,968명, 북한은 150만 명에 이르러 남북한 총 인명손실이 249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현충원


또한, 전쟁 직후 북한 인민군이 남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38선 인근 주민과 서울·경기 지역의 민간인들이 대규모로 대구, 부산 등의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중공군의 참전으로 UN 연합군이 수세에 몰리면서 북한의 민간인들과 서울과 이남 지역의 민간인들이 다시 대규모로 남하(南下)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행렬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대규모 피란민을 수용할 수 있는 정부의 정책이 마련되었다면 좋았으련만, 북한군의 화력에 밀려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한달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하게 되어 전 국토의 약 90%를 빼앗긴 상태에서 정부의 피란민정책을 기대하긴 힘들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이에 정부의 피란민 수용소에 수용되어 배급 등으로 연명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피란민에 대한 주거정책이 전무한 상태에서 대부분의 피란민들은 산비탈이나 하천 등에 천막집이나 판자집을 짓고 살아야 했으며, 국토의 피폐화로 농업 부문의 노동력이 감소한 것에 반하여 식량 소비량이 증가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이나 먹으며 버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촌


전 국민의 반 이상이 전재민(戰災民)이 된 상태에서 가축까지 보살 필 여유가 없게 되자 가축들은 대부분 방치된 상태에서 군인 또는 피난민들의 식량으로 소진되거나 전쟁의 포화를 피하지 못하면서 남한 지역의 소 19만 8천889마리, 돼지 35만 9천590마리, 닭 208만 3천580마리가 전화(戰火)를 입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군인들의 돼지 손질 장면


이렇게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가축의 사육두수까지 급감하게 되자 대다수 국민들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되었고, 고기 한점 먹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쟁기간 중 UN과 미국 등의 긴급구호활동으로 피난민에게 식료품 등의 다양한 구호물자가 제공되긴 하였으나, 피란민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UN의 구호물자


그러다보니 월남(越南)한 북한의 민간인과 남하한 남한의 민간인들은 생존을 위하여 스스로 생계유지방안을 찾아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피란민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양한 지역에 정착하게 되면서 자신의 고향에서 먹던 음식을 먹기도 하고, 생계를 위하여 팔기도 하면서 돼지로 만든 특정 지역의 토속음식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거나 전쟁 이전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던 부위를 요리하여 먹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노점상


정부도 전쟁으로 인하여 돼지를 비롯한 가축의 사육두수가 급감하여 전 국민이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겪게 되자 재래돼지보다 체격이 크고 성장률이 높았던 개량돼지의 사육을 장려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의 개량돼지 배부 장면


즉, 해방 이전까지는 재래돼지와 일제강점기에 도입한 요크셔 또는 버크셔와의 교잡종이 사육되다가 해방 이후에는 주로 버크셔종으로 대체되었으며, 1952년에는 한국전쟁으로 급격하게 감소한 한국의 가축을 보충하기 위하여 자선단체인 헤이퍼 프로젝트(Heifer Project)로부터 미국 아이오와(Iowa)주의 자돈 180두(버크셔종 142두, 햄프셔종 18두, 듀록종 20두)를 지원받아 처음으로 듀록(Duroc)과 햄프셔(Hampshgire)종이 도입되었고, 1955년에는 미국 오하이오(Ohio)지방으로부터 체스터화이트종(Chester White) 5두, 폴랜드차이나종(Poland China) 6두를 지원받아 다양한 서양의 돼지품종이 보급되면서 재래돼지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헤이퍼프로젝트에 의하여 지원된 버크셔종 구호 돼지


이러한 노력들은 재래돼지의 개량에 효과적이었으므로, 돼지사육두수의 빠른 증가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나, 여전히 전시상황에서 대부분의 일반 서민들은 가난하여 돼지고기 한 점 마음대로 먹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돼지의 살코기를 이용한 요리보다는 그 부속물이나 내장 등 그나마 저렴하게 많은 양을 얻을 수 있는 부위로 최대한 많은 양을 만들 수 있는 요리들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1년이 지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든 가운데 1951년 7월부터 휴전협상이 시작되어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休戰)이 되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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