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업/정육상식

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7편 1940년대-2)

오늘도힘차게 2019. 11. 21.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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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7편 1940년대-2)



폭우와 홍수, 돼지열병 등의 발생으로 쌀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은 물론 축산물도 턱없이 부족하여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되었습니다.


광복 전후 조선은행권 발행고와 서울 소매 물가 지수


광복 직후 1근당 우육(牛肉)은 19원, 돈육(豚肉)이 26원 하던 것이 1946년에는 우육 71원, 돈육 75원으로, 1947년에는 우육 188원, 돈육 188원, 1948년에는 우육 307원, 돈육 285원이 되었습니다.


3~4년 사이에 소고기의 가격은 16.2배, 돼지고기는 11배가 올랐습니다.


당시 면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여공(女工)의 일당이 142원36전이었고, 월급여가 3,559원 정도였으므로 소고기나 돼지고기 1근을 먹으려면 한푼도 안쓰고 일당을 이틀 모아야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비쌌습니다.


1948년 직종별 월급여 수준


그러자, 미군정은 물자의 인위적 배분과 가격통제를 실시하기 위하여 중앙가격행정처(中央價格行政處)를 두고 최고판매가격제를 실시하였습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중앙가격행정처는 1947년 11월 14일부터 전국적으로 실시하였고, 인구수를 고려하여 대도시로 1급지였던 서울은 1근당 우육 190원, 돈육 190원, 중소도시로 2급지였던 각 도(道)는 1근당 우육 185원, 돈육 185원, 농어촌으로 3급지였던 각 군(郡)은 1근당 우육 180원, 돈육 180원이라고 하였습니다.


1947년 11월 20일 경향신문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은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 극도의 식량난과 고물가를 야기하여 밀도살(密屠殺)과 남도살(濫屠殺)이 성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양돈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 및 관리하기에는 당시 정치적ㆍ사회적 분위기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인력과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개량돼지와 재래돼지가 혼재되어 농가의 소규모 부업형태로 부산물과 잔반 등에 의하여 사육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일제강점기 권업모범장을 중앙농업기술원 성환축산지원으로 개칭하고, 축산과를 신설하여 종돈(種豚)의 개량 및 생산보급, 양돈사양방법에 대한 시험연구와 방역 등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축산장려 9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체계적인 양돈산업의 발전을 위한 기반을 확립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1965년 중앙축산기술원 경주지원 전경


그 외에도 소고기를 선호하고 돼지고기를 기피하였던 식문화로부터 축우(畜牛)를 보호하고, 돼지고기의 소비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양돈업을 적극장려하고, 축우는 도살을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1948년 3월 5일 경향신문


하지만, 정부의 다양한 노력이 무색하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생하게 되면서 양돈산업은 더욱 큰 피해를 입게 되어 1949년 52만 5천 두에 이르던 돼지사육두수는 1950년 15만 6천 두로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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