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업/정육상식

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4편 중세시대-1)

오늘도힘차게 2019. 11. 14.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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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4편 중세시대-1)



삼국시대 후기에 이르러 고대국가들의 영토가 점점 확장됨에 따라 기존의 토속신앙을 억압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고려시대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불교의 업사상과 윤회사상을 왕권에 적용하여 왕의 권위를 세우는 동시에 백성들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식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교리에 따라 육식 및 육류의 조리법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농업생산력이 가장 우수하였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면서 밥을 주식으로 하고, 기본 반찬으로 구성된 식단이 일반화되었습니다.


백제 상차림

신라 상차림


하지만, 삼국통일로 고구려와 백제의 식재료와 식문화가 신라에 유입되면서 더욱 풍부한 음식문화가 형성되었고, 돼지고기도 일반적인 조리방법 이외에 돼지고기를 얇게 포를 떠 말린 후 먹는 육포(肉脯), 소금이나 술에 절여 만드는 젓갈 및 조사(助史 : 젓국) 등으로도 다양하게 만들어 먹었습니다.


육포(肉脯)


불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국가의 지원을 받아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숭상하여 불교의 교리는 정치·사회의 지도이념이 되어 육식을 엄격히 금하여 육류보다 채소류의 음식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 상차림


그러다보니 축력을 활용할 수 있는 소와 말 등의 목축은 유지되었지만, 축력을 이용할 수 없어 오로지 식용을 목적으로 하는 돼지의 목축은 그 규모가 점차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하여 돼지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제사(祭祀) 또는 사신접대(使臣接待) 등에 제한적으로 사용되다보니 자연스레 돼지의 조리방법 등은 초보적인 수준으로 회귀(回歸)하게 되었습니다.



1123년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인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에는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였고,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國俗有羊豕非王公貴人不食細民多食海品)”라고 하였으며, “고려의 정치는 매우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한다. 따라서 국왕이나 재상[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신이 방문하게 되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기른다. 〈그 가축을〉 도축할 때는 손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후에 배를 가르는데 장위(腸胃)를 모두 자르고 똥과 오물을 씻어낸다. 따라서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않으니, 그 서툰 것이 이와 같다(夷政甚仁, 好佛戒殺. 故非國王相臣, 不食羊豕. 亦不善屠宰. 唯使者至, 則前期蓄之. 及期將用, 縛手足, 投烈火中, 候其命絶毛落, 以水灌之. 若復活則以杖擊死然後, 剖腹腸胃盡斷, 糞穢流注. 雖作羹䏑, 而臭惡不絶, 其拙有如此者.)”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하지만, 고려의 식생활 문화는 고려 후기 세계에서 가장 육류를 많이 섭취하는 민족 중의 하나인 몽골의 침입으로 반전을 맞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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