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업/정육상식

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3편 고대시대-2)

오늘도힘차게 2019. 11. 13.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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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3편 고대시대-2)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장손무기(長孫無忌) 위징(魏徵) 등이 중국 수(隋)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隋書)의 열전(列傳),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백제와 관련하여 “백제에는 오곡이 산출되며 소, 돼지, 닭을 많이 기르고, 백제 사람들은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흔히 익혀서 먹지 않는다(有五穀牛豬雞, 多不火食)”라고 하여 백제인은 돼지를 익혀먹기 보다 생식을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서(隋書)


또한,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따르면 부여는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명하였고, '마가', '우가', '저가(猪加)',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가 있다(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 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고 하여 돼지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고, 부여에 예속되었던 부족중의 하나인 읍루(相婁)는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겨울에 돼지 비계를 몸에 여러번 두껍게 칠하여 추운 바람을 막는다(其俗好養 , 食其肉, 衣其皮. 冬以 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라고 하였습니다.


삼국지(三國志)


당나라의 역사책인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는 “그 나라가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太白山)의 토끼, 남해(南海)의 다시마, 책성(柵城)의 된장(豉), 부여(扶餘)의 사슴, 막힐(鄚頡)의 돼지, 솔빈(率賓)의 말, 현주(顯州)의 베, 옥주(沃州)의 솜, 용주(龍州)의 명주, 위성(位城)의 철, 노성(盧城)의 벼, 미타호(湄沱湖)의 가자미이다”라고 하여 돼지를 막힐부의 특산품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전에서는 “재상(宰相)의 집에는 녹(祿)이 끊어지지 않으며, 노비가 3천명이나 되고, 갑병(甲兵)과 우(牛), 마(馬), 돼지도 이에 맞먹는다”라고 기록하여 당시 돼지의 목축규모가 어느 정도였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당서(新唐書)


그 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유리왕 편에서는 “가을 8월에 교제(郊祭)에 쓰일 돼지가 달아나자 탁리(託利)와 사비(斯卑)에게 잡아오도록 하였고, 이들은 장옥(長屋)에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게 되자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칼로 돼지의 다리 힘줄을 자른 후 가져오자 유리왕은 이를 듣고 매우 노하여 ‘하늘에 제사 지낼 제물에 어찌 함부로 상처를 입히느냐?’며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殺之)”라고 기록하여 당시 돼지가 제례, 잔치용, 선물용 등의 특수한 목적에 사용되었고, 샤머니즘(shamanism)등의 영향에 따라 특별하게 관리되었음을 방증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이렇게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돼지는 흠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통째로 굽거나 훈연한 뒤에 썰어서 먹었으며, 그 외 돼지를 먹는 일반적인 경우에는 물에 넣고 삶는 숙육(熟肉)이나 말린 포(脯), 국이나 탕 등으로 조리하여 먹었습니다.


안악3호 고분벽화 부엌도


또한, 고구려의 대표적인 돼지고기 음식으로 맥적(貊炙)을 꼽을 수 있는데요.


1906년 사학자이자 문인(文人)이었던 최남선(崔南善)이 저술한 역사개설서인 고사통(故事通)에 따르면 “중국 진(晉)나라 때의 책 수신기(搜神記)를 보면 ‘지금 태시(太始) 이래로 이민족의 음식인 강자(羌煮)와 맥적(貊炙)을 매우 귀하게 안다. 그래서 중요한 연회에는 반드시 맥적을 내놓는다. 이것은 바로 융적(戎狄)이 쳐들어 올 징조이다’라고 경계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맥적에는 대맥(大貊)과 소맥(小貊)이 있었으며, 한대(漢代)에서 이것을 즐겨 맥적을 중심으로 차린 연회를 맥반(貊盤)이라 하였다. 강(羌)은 서북쪽의 유목인을 칭하는 것이고, 맥(貊)은 동북에 있는 부여인과 고구려인을 칭한다. 즉 강자(羌煮)는 몽골의 고기 요리이고, 맥적(貊炙)은 우리나라 북쪽에서 수렵생활을 하면서 개발한 고기구이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사통(故事通)


이에 최남선의 연구 이래로 맥적은 현재 불고기의 기원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신기 원문에는 “호상과 맥반은 적인의 기물이다. 강자와 맥적은 적인들의 음식이다. 태시(265~274년) 이래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게 됐다. 귀족과 부자들은 반드시 그런 기물을 쌓아두고, 잔칫날 귀한 손님들에게 앞다투어 내놓았다. 이는 융적이 중국을 침입할 징조였다(胡床貊盤, 翟之器也. 羌煮貊炙, 翟之食也. 自太始以來, 中國尙之. 貴人富室, 必留其器, 吉享嘉賓, 皆以爲先. 戎翟侵中國之前兆也)”라고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맥(貊)’이 고구려를 지칭한다거나 ‘적(炙)’이 고기를 양념하여 구워먹는 요리라고 해석할 근거가 없으므로 맥적을 불고기의 기원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요.


수신기(搜神記)


후한의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 등에 따르면 “구려일명맥이(句麗一名 貊耳)”이라고 하여 고구려를 맥(貊)이라고 지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유사한 시대에 편찬된 유교 경서 의례(儀禮)에는 범적무장(凡炙無醬)이라 하여 적(炙)은 이미 조미가 되어 있기 때문에 먹을 때 장에 찍어 먹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적(炙)이 양념된 고기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한서(後漢書)


따라서, 고구려를 뜻하는 맥(貊)에 구울 적(炙)을 붙여 고구려의 양념된 고기구이라는 의미로 맥적(貊炙)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맥적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중국 후한의 사서인 석명(釋名)에 따르면 “맥적은 통으로 구워, 각자의 칼로 저며 먹는다. 오랑캐(호맥)의 방식에서 나왔다(貊炙, 全體炙之, 各自以刀割出於胡貊之爲也)”라고 하여 맥적이 통구이 요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석명(釋名)


이러한 사실은 무용총(舞踊塚)접객도(接客圖)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데요.


무용총의 접객도는 고구려 중기를 대표하는 고분벽화중의 하나로 시동(侍童)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주인에게 작은 칼을 들고 시중드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고구려 무용총(舞踊塚)의 접객도(接客圖)


벽화상 시동이 칼로 무엇을 자르려고 하는지 명확하게 나타나진 않았지만, 고구려는 수렵문화와 목축업이 발달하여 다른 고대국가보다 육식을 즐겼으며, 샤머니즘(shamanism)의 영향에 따라 제물이나 희생용으로 이용되는 돼지는 흠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통째로 굽거나 훈연한 뒤에 썰어서 먹었으므로 접객도를 시동이 고기를 써는 장면으로 충분히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간장 등의 양념이 만들어진 이후 조미된 고기구이는 누구나가 즐기는 요리였으므로 조미된 고기구이 또는 통구이가 고구려에만 있었던 독특한 요리문화는 아니었습니다.


남월왕묘(南越王墓) 부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고구려의 양념된 통구이를 맥적이라 특별히 지칭하며 부유층에서 유행하였다는 것은 중국과는 양념이나 굽는 방식 등에서 차이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위진 벽화묘(魏晋壁畵墓)


사실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고문서(古文書)만으로 맥적이 어떤 양념에 어떤 방식으로 재워졌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고, 고기를 얇게 자르고 채소 등의 다른 재료와 함께 굽는 지금의 불고기와는 그 외형이 달라 맥적이 불고기의 기원이라고 단언하기 어려울 수 있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진 벽화묘(魏晋壁畵墓)


하지만, 반대로 맥적이 중국과는 다른 독특한 양념에 고기를 재운 후 구워 먹었던 것을 감안하면 지금의 불고기와 유사하므로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 또한 힘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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