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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2)

오늘도힘차게 2016. 11. 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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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2)

 

백정들이 소의 내장 등을 이용한 설렁탕을 팔았던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일관했던 조선왕조는 대내적으로 왕권이 약화되었고, 대외적으로는 급변하는 세계적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여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의 큰 사건을 거치면서 온 나라는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고,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으로 인한 일본으로의 대규모 곡물유출은 식량난을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강화도 조약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한 농민들은 정치의 개혁과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는 대규모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을 일으켰으며, 이를 계기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되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은 오랜기간 지속되어 온 신분제도를 철폐하도록 하여 표면상 백정들도 평등한 지위를 얻어 근대도시로 진출하게 되지만, 뿌리깊게 자리잡았던 신분의식은 한꺼번에 바뀌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양반의 지위를 누려왔던 사람들도 설렁탕을 좋아하긴 하였으나, 백정이 운영하는 설렁탕 가게에 가는 것은 체면을 구기는 것이라 생각하여 직접 가지 않고 설렁탕을 집으로 배달시켜서 먹었다고 합니다.

 

1934년 4월 5일 조선일보 안석영 만평 '음식 배달부와 귀부인'

 

이렇게 하여 저렴한 가격에 맛과 영양이 풍부하였던 설렁탕은 인구가 가장 많았던 서울을 중심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1920년 10월 8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당시 설렁탕집은 서울 안팎에 25곳이었으나, 1924년에는 100곳(1924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으로 증가하였고, 당시 종로와 청계천 주변에는 설렁탕집이 빼곡하였다고 합니다.

 

1920년대 매일신보

 

사실 일제강점기에 설렁탕집이 폭증하게 된 원인은 일본의 군수물자조달을 위한 수탈과 관련이 있는데요.


조선총독부의 기록에 따르면 1910년대에는 연간 2만3000마리 수준이었던 한우 수탈이 1920년대에는 연간 5만 마리, 1930년대에는 연간 5만3000마리, 1940년대 초반에는 연간 10만 마리로 증가하였고, 총 150만 마리를 일본 화우의 개량 및 식량조달 등의 목적으로 수탈하였습니다.

 

일본의 한우 수탈 모습

 

하지만, 일본인은 살코기를 뺀 소머리·내장·뼈·꼬리 등은 먹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소의 부산물이 발생하였고, 내장 등이 부패하기 전에 이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인구가 밀집된 곳에서 팔아야 했으므로 당시 인구가 가장 많았던 서울을 중심으로 설렁탕집은 자연스럽게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대 설렁탕집 모습

 

이런 모습은 내장을 먹지 않았던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매우 낯선 풍경이었지만,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였습니다.


이에 설렁탕을 먹는 일본인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조선인과 다름없이 설렁탕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사회부 기자 우스다 잔운(薄田斬雲)은 우리나라의 풍속·사회·문화에 대하여 소개한 최초의 만화책인 “조선만화”에서 설렁탕에 대하여 “의사들의 감정에 따르면 이 쇠머리 스프는 정말로 좋은 것으로 닭고기 스프나 우유가 그에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한다. 큰 솥은 일년 내내 걸쳐져 있으며 바닥까지 아주 깨끗이 씻는 일도 없다. 매일매일 뼈를 교체하고 물을 더 부어서 끓여낸 다. 이 국물 즉 스프는 아주 잘 끓여 내린 것으로 매일 연속해서 끓이기 때문에 여름에도 상하는 일이 없으며 이것을 정제하면 분명히 세계의 어느 것도 비견할 수 없는 자양분이 된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지금 쇠머리 스프를 병에 담아 한국 특유의 수출품으로서 상용하게 될 것이다”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우스다 잔운

조선만화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 당시 발행되었던 대중잡지 “별건곤”에서는 설렁탕을 “하층계급이 주로 먹는 경성의 별미”라고 하였고, 1924년 개벽에 발표된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은 인력거꾼 김첨지에게 비오는 날 불어닥친 행운이 결국 아내의 죽음이라는 불행으로 역전되고 만다는 단편소설로서, 매우 가난한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설렁탕 국물이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마지막에 김첨지가 싸늘하게 식은 아내를 붙들고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라며 우는 장면은 학창시절 아련한 여운을 남겼던 것을 대부분 기억하실 겁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한 장면

 

이렇듯 소의 내장을 이용한 설렁탕은 근대시대에 이르러 서울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음식이었습니다.

 

가축을 도살하여 생산된 살코기를 비롯한 주요 부위는 사대부를 비롯한 왕실의 몫이었으므로, 서민들은 남겨진 내장과 부산물 위주로 먹을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이 설렁탕으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민들이 내장과 부산물을 탕으로 먹었던 것과 달리 사대부를 비롯한 왕실은 일반적으로 살코기 위주로 먹었기 때문에 내장은 별미로 즐겼습니다.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에 따르면 육류 중에서는 신선한 내장은 회로 먹거나 삶아서 전 또는 적으로 먹었다고 하며, 조선후기 궁중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에 따르면 소의 내장(內臟)으로 만든 갑회(甲膾)는 궁중에서 즐겼던 별미로서,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올랐다고 합니다.

 

갑회

 

내장요리를 대표하는 순대 또한 사대부와 왕실에서 별미로 먹었던 고급음식었습니다.


현재는 순대하면 돼지의 내장만을 이용한 음식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내장을 이용하여 순대를 만들었습니다.


안동장씨가 쓴 조리서인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에 따르면 개의 창자를 이용한 개순대, 소의 경우는 저자미상의 조리서인 주방문(酒方文)팽우육법(烹牛肉法, 황육 삶는 법), 유중림의 농서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우장증방(牛腸蒸方, 소의 내장을 찌는 법) 등이 기록되어 있고, 돼지의 경우에는 홍만선이 엮은 농서 겸 가정생활서인 산림경제(山林經濟)조증저두(糟蒸猪月土, 돼지밥통 찌는 법), 저자미상의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도야지순대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대

 

제1편 내장식육의 개요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4
제2편 내장식육의 한국사-선사시대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5
제3편 내장식육의 한국사-고대시대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6
제4편 내장식육의 한국사-중세시대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7
제5편 내장식육의 한국사-근세시대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8
제6편 내장식육의 한국사-근대시대 1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9
제7편 내장식육의 한국사- 현대시대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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