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업/정육상식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5편 근세시대)

오늘도힘차게 2016. 11. 19.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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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5편 근세시대)

 

 

불교의 교리로 인하여 금기시되었던 육식은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 다시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조금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의 육식문화가 조선의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졌으며, 소고기를 가장 선호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1778년 실학자 박제가(朴齊家)가 기술한 북학의(北學議)에 따르면 성균관과 한양에는 24개의 푸줏간이 있었으며, 매일 500마리의 소를 도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학의

 

조선시대는 농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이었던 농경사회로서, 농기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소가 농사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소를 마구잡이로 도축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육식문화가 사대부를 넘어 양민들에게까지 퍼지게 되어 곳곳에서 소의 도축과 절도가 횡행하게 되자 태조 7년(1398)에는 소의 도축을 금지하는 우금령(牛禁令)까지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온 나라에 퍼진 육식문화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우금령에 따른 단속과 처벌을 소고기를 가장 즐겼던 사대부가 담당했기 때문이죠.


이러한 사실은 난로회(煖暖會)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요.

 

난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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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풍속집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난로회는 “음력 10월에 숯불을 지핀 화로를 가운데 놓고 번철(燔鐵, 솥뚜껑처럼 생긴 둥글고 넓적한 무쇠그릇)을 올려 소고기를 구워먹는 것”으로서, 날씨가 추워지는 10월부터 추위를 막기 위한 조선시대 한양의 풍속이었습니다.

 

동국세시기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우심적도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우심적(牛心炙)이란, 소의 염통을 얇게 저며서 양념간장으로 간을 하여 구운 음식인데요.

 

소 염통구이


사대부들이 우심적을 즐겼던 것은 왕희지와 관련된 고사(故事)때문이었습니다.


왕희지(王羲之)는 글씨에 통달한 서성(書聖)으로 불린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로서, 당시 사대부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왕희지

왕희지의 글씨


하지만, 왕희지가 어린 시절에는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진나라의 주의(周顗)가 당시 13살이었던 왕희지를 특별하게 여겨 우심적을 대접한 일이 있었고, 그 이후 사대부들 사이에서 우심적을 대접한다는 것은 당신을 왕희지와 같이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귀한 음식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심적이 유행을 하다보니 나중엔 소의 염통이 모자라게 되어 소의 간으로 우심적을 대체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고려사(高麗史)에는 “마계량은 탐욕스럽고 소의 위를 즐겨 먹으니, 백성들은 말(馬)이 소를 먹는다고 빈정거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사


그 외에도 가축의 내장을 이용한 요리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소의 내장과 관련하여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소의 곱창으로 만든 소곱창찜, 저자 미상의 조리서인 규곤요람(閨壼要覽)에는 소의 콩팥, 천엽, 위, 간, 양을 회로 먹는 방법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규합총서

규곤요람


또한, 돼지의 내장과 관련하여 저자 미상의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돼지의 창자로 만든 돼지순대, 또 다른 조리서인 요록(要錄)에는 돼지허파를 이용한 허파탕 등이 기록되어 있고,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는 개의 창자를 이용한 개순대,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양의 창자를 이용한 양고기순대구이, 산림경제에는 양의 간과 천엽을 이용한 회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식디미방

제민요술


조선 광해군 때 유몽인이 지은 한국 최초의 야담집인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임진왜란 때 중국 군사 10만 명이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주둔하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회를 잘 먹는 것을 보고 “소의 밥통의 고기나 처녑 같은 것은 모두 더러운 것을 싼 것이다. 이것을 회를 해서 먹는다니 어찌 뱃속이 편안하겠는가”라고 하며, “중국사람은 잘 익은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이것은 오랑캐의 음식이다”라고 하자 우리나라의 한 선비가 “회나 구운 음식은 모두 고인(古人)들이 좋아하던 것이다. 고서에도 기록이 많이 보이니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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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것이 동아시아권에서 살코기를 비롯하여 내장을 회로 먹는 국가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원(元)나라 초기 문헌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 따르면 양의 간 등을 회로 먹는 양육회방(羊肉膾方)이 기록되어 있고, 유교경전인 논어(論語)에 따르면 “공자가 짐승과 물고기 회를 즐겼다”라고 하여 처음부터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11세기 송(宋)나라시대에 이르러 급성 유행성 열병인 온역(瘟疫)이 창궐하여 수천만명이 사망하였고, 그 원인을 소고기 육회라고 보아 그 때부터 중국은 아예 날음식은 거의 먹지 않게 되었으며, 이후 불에 익히거나 튀기는 요리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또한 생선 외에는 날음식을 거의 먹지 않고 있습니다.

 

제1편 내장식육의 개요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4
제2편 내장식육의 한국사-선사시대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5
제3편 내장식육의 한국사-고대시대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6
제4편 내장식육의 한국사-중세시대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7
제6편 내장식육의 한국사-근대시대 1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69
제6편 내장식육의 한국사-근대시대 2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70
제7편 내장식육의 한국사- 현대시대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6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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