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식육 8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7편 현대시대)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7편 현대시대)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의 소는 일본의 군수물자조달을 위한 수탈로 급격하게 숫자가 감소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정은 해방 이후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습니다. 이에 정부는 매우 제한적이었던 축산물의 수급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안정을 위하여 물가를 통제하였으며, 역용종(役用種) 소도 부족한 상황에서 계속 소를 도축하자 축우도살제한법(畜牛屠殺制限法) 등을 공포하여 소의 도축을 금지하기도 하였습니다. 1949.03.06. 동아일보 축우도살제한법 기사 하지만, 정부의 이런 시책에도 불구하고 매우 열악하였던 식량수급사정상 고기값은 계속 폭등하게 되며, 내장 등의 부속물도 가격이 폭등하게 됩니다. 1950.04.23. 동아일보 육가인상 관련 기사..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2)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2) 백정들이 소의 내장 등을 이용한 설렁탕을 팔았던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일관했던 조선왕조는 대내적으로 왕권이 약화되었고, 대외적으로는 급변하는 세계적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여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의 큰 사건을 거치면서 온 나라는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고,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으로 인한 일본으로의 대규모 곡물유출은 식량난을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강화도 조약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한 농민들은 정치의 개혁과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는 대규모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을 일으켰으며, 이를 계기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되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은 오랜기간 지속되어 온 신분제도..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1)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1) 농업을 국가시책으로 정한 조선은 농민들이 장시(場市)에 모여 유흥을 즐기거나 상업활동을 위하여 이동하는 것은 국가의 근본인 농업생산에 해롭다고 판단하여 농촌에서의 장시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으로 국토가 피폐하게 되자 농민들은 생활의 터전이었던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집중되었으며, 그 결과 도시의 상업인구도 증가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상업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상업의 발전에 따라 도시의 이곳 저곳에 크고 작은 시전(市廛)이 생겼으며, 육류의 살코기와 내장 또한 식료품의 일종이었으므로 시전에서 거래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시전의 모습 유본예(柳本藝)가 기술한 조선 후기 서울의 인문지리 역사서인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꿩고기는 병문(..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5편 근세시대)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5편 근세시대) 불교의 교리로 인하여 금기시되었던 육식은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 다시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조금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의 육식문화가 조선의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졌으며, 소고기를 가장 선호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1778년 실학자 박제가(朴齊家)가 기술한 북학의(北學議)에 따르면 성균관과 한양에는 24개의 푸줏간이 있었으며, 매일 500마리의 소를 도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학의 조선시대는 농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이었던 농경사회로서, 농기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소가 농사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소를 마구잡이로 도축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4편 중세시대)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4편 중세시대) 삼국시대 후반 고대국가들은 영토가 점점 확장됨에 따라 왕권을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에 각 나라는 기존의 토속신앙을 억압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즉, 불교의 업사상과 윤회사상을 왕권에 적용하여 왕의 권위를 세우는 동시에 백성들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고려시대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불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국가의 지원을 받아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숭상하여 불교의 교리는 정치·사회의 지도이념이 되었고, 이는 식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교리에 따라 육식 및 육류의 조리법은 점차 쇠퇴하고..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3편 고대시대)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3편 고대시대) 현대의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약 70만년 전 한반도에 인류가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한반도에 유입된 초기 인류는 야생동식물의 수렵 및 채집을 기반으로 이동생활을 하다가 한반도 여러 곳에 정착하게 되는데요.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내륙의 북쪽과 동쪽은 험준한 산악지대가, 남쪽과 서쪽에는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는 지정학적 특징에 따라 남쪽과 서쪽에 정착하게 된 인류는 평야에서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어로활동을 하는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북쪽과 동쪽에 정착하게 된 인류는 수렵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가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상대적으로 북쪽에 위치하였던 고조선, 발해, 고구려 등의 고대국가는 백두..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2편 선사시대)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2편 선사시대) 인류의 기원에 대하여는 명확한 자료가 없어 아직까지도 창조론과 진화론 등의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최초의 인류는 약 700만 ~ 5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인류의 기원 이렇게 인류가 지구역사에 등장한 이래 지금처럼 가축의 내장과 살코기를 자신의 취향에 따라 골라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오랜 기간 인류에게는 늘 먹거리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류로 알려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가 살던 시대에는 초원이 가슴높이까지 무성하였고, 마땅한 사냥수단이 없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어디서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식물성 먹거리를 주식으로 하였습니..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1편 내장식육의 개요)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1편 내장식육의 개요) 내장(內臟, Internal Organs, viscera)이란, 가축의 흉강과 복강에 있는 기관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서, 가축들이 외부 환경으로부터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호흡, 소화, 해독, 면역 작용 등의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축이 도축된 이후에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각 나라의 고유한 식육문화에 따라 식용으로 이용되거나 폐기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폐기하는 부위가 거의 없을 정도로 도축된 가축의 내장 대부분을 식용으로 활용하고 있는데요. 특히, 소의 경우에는 예로부터 일두백미(一頭百味)라 하여 소 한 마리에서 100가지의 다양한 맛이 나며, 고기와 머리, 내장 등을 포함하여 그 부위를 최대 120개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