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내장요리 3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2)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2) 백정들이 소의 내장 등을 이용한 설렁탕을 팔았던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일관했던 조선왕조는 대내적으로 왕권이 약화되었고, 대외적으로는 급변하는 세계적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여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의 큰 사건을 거치면서 온 나라는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고,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으로 인한 일본으로의 대규모 곡물유출은 식량난을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강화도 조약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한 농민들은 정치의 개혁과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는 대규모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을 일으켰으며, 이를 계기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되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은 오랜기간 지속되어 온 신분제도..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1)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1) 농업을 국가시책으로 정한 조선은 농민들이 장시(場市)에 모여 유흥을 즐기거나 상업활동을 위하여 이동하는 것은 국가의 근본인 농업생산에 해롭다고 판단하여 농촌에서의 장시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으로 국토가 피폐하게 되자 농민들은 생활의 터전이었던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집중되었으며, 그 결과 도시의 상업인구도 증가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상업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상업의 발전에 따라 도시의 이곳 저곳에 크고 작은 시전(市廛)이 생겼으며, 육류의 살코기와 내장 또한 식료품의 일종이었으므로 시전에서 거래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시전의 모습 유본예(柳本藝)가 기술한 조선 후기 서울의 인문지리 역사서인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꿩고기는 병문(..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5편 근세시대)

내장식육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5편 근세시대) 불교의 교리로 인하여 금기시되었던 육식은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 다시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조금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의 육식문화가 조선의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를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졌으며, 소고기를 가장 선호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1778년 실학자 박제가(朴齊家)가 기술한 북학의(北學議)에 따르면 성균관과 한양에는 24개의 푸줏간이 있었으며, 매일 500마리의 소를 도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학의 조선시대는 농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이었던 농경사회로서, 농기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소가 농사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소를 마구잡이로 도축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