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업/정육상식

안성국밥의 유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오늘도힘차게 2023. 10. 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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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국밥의 유래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안성은 예로부터 동래-밀양-대구-충주-용인-판교-한양으로 이어지는 영남로(嶺南路)와 강진-나주-태인-삼례-한양으로 연결되는 호남로(湖南路)를 잇는 길목에 위치하여 삼남(三南)의 각종 물화(物貨)와 조세(租稅)가 모이는 집산지(集散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대동여지도

 

 

이는 조선 후기 소설가였던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許生傳)”에서 안성을 “경상, 전라, 충청 3남의 물화가 모여 서울로 이송되는 길목(畿湖之交 三南之鎬口)”이라 하였고,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 에서 “안성은 경기도와 호서 지방 해협 사이에 위치하여 화물이 수용되고 공인과 상인이 모여들어 서울 이남의 도회가 되었다”라고 기록하여 안성이 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물류의 집산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허생전(許生傳) 택리지(擇里志)

 

이렇게 수많은 인적·물적·요소들이 안성에 모이다보니 자연스레 장시가 형성되었고, 안성장은 조선 중기 3대 향시(鄕市)로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안성장터

 

당시 소를 거래하였던 우시장도 안성장의 형성과 발달과정을 같이 하였고,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우시장은 도살장을 겸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안성우시장

 

이에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정부의 공식기관지로 활용되었던 구한국 관보(舊漢國官報)에 따르면 안성은 경기도 도살장 설립지 2등지에 해당한다고 하였으며, 추수 김태영(秋水 金台榮)이 저술한 안성기략(安城記略)에는 1923년 9,006마리의 소가 출하되고, 3,773마리가 거래되었으며, 그 다음해인 1924년에는 8,365마리의 소가 출하되고, 4,188마리가 거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한국 관보(舊漢國官報) 안성기략(安城記略)


이렇게 수많은 상인들과 가축들이 드나들었던 안성장에는 마을어귀, 고갯길, 나루터 등 이동교통로 곳곳에 상인들을 상대로 한 시전(市廛)과 난전(亂廛)들이 들어서 각종 음식을 팔게 되었습니다. 

 

안성장터

 
특히, 우시장에서 소의 도축으로 생산되는 뼈ㆍ내장ㆍ꼬리ㆍ머리ㆍ피 등의 부산물들은 냉장시설이 없던 탓에 쉽게 부패하였기 때문에 빠르게 소비되어야 했고, 살코기에 비하여 저렴하게 유통되었으며, 뼈와 내장 등을 물에 고으면 많은 고깃국물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이를 활용한 우탕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안일옥 설렁탕

 
우탕은 소고기나 소의 부산물을 이용한 설렁탕, 소머리국밥, 도가니탕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안성장이 번성하게 되면서 다양한 우탕 식당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주막

 
당시 중노동을 견디며 지친 민초(民草)들에게 장시에서 파는 우탕 한 그릇은 허기진 배를 달래주는 동시에, 원기를 북돋아주는 영양식으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장터국밥

 
하지만, 20세기 초반 안성장 주변에 새로운 장시들이 형성되고, 일본의 조선 진출을 위한 기반 사업으로 시행된 경부선 철도의 개통으로 각 지방의 물류가 안성을 거치지 않고 직접 기차로 운반되면서 안성장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1905년 5월 25일 경부선(경부철도) 개통식 장면

 
이에 오가는 이들 또한 감소하여 우탕 식당들도 하나둘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나,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부터 안성장 한쪽 난전에서 故 이승례씨가 가마솥에 끓여 팔았던 우탕은 당시 상인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계속 영업을 하였고,  

 

 
이름없던 우탕은 안성장터국밥이 되어 현재까지 안일옥(安一屋)은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경기도에선 가장 오래된 식당으로 꼽히며 안성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故 이승례씨 안성장터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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