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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분할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2)

오늘도힘차게 2018. 8. 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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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분할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6편 근대시대-2)



조선이 격동기를 겪고 있는 동안 일찍이 서구문물을 수용하였던 일본은 열강의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시작으로 1905년에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침탈한 후 1910년 한일병합조약(韓日合倂条約)까지 체결하여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일병합조약 전권위임장


근대화 과정에서 이룩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식민지화시킨 일본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여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군사권을 장악하고,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각종 탄압과 수탈을 자행하였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이 과정에서 조선은 일본에 의하여 의도치 않게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자국의 식량부족문제의 해결과 대륙침략 및 태평양전쟁을 위한 군수물자의 공급을 위한 수단으로 조선을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를 위하여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조선의 농축산물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수탈대상을 선정하였고, 토지소유관계를 근대적으로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을 추진하여 수많은 농민들의 농지를 침탈하였습니다.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또한, 식민지 지배와 경제수탈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던 서울과 평양 등의 대도시 중심가 위주로 도시계획을 실시하여 도시 중심가에 거주하던 조선인을 외곽으로 강제로 이주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서울 외곽 토막민들의 토막집


이렇게 수탈의 근간을 마련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의 자원을 수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권업모범장이 조사한 권업모범장성적요람(勸業模範場成績要覽) 등에 따르면 한우는 “일본 재래종에 비해 골격이 크면서 온순하고 영리해 일소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거친 사료도 잘 먹고 환경 적응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라고 판단하여 한우를 수탈대상의 품목에 포함시키고, 최대한 수탈하기 위하여 증식정책을 펼쳤습니다.


1911-1941년까지 축우와 돼지 사양 규모


이에 한우의 사육두수는 일제강점기 기간동안 급증하였으나, 1900년부터 1942년까지 43년간 약 150만 마리의 한우가 국외로 반출(搬出)되어 일본군의 피복, 군화, 배낭, 혁대 등의 군수물자 생산 및 식량조달에 이용되거나 한우보다 열등하였던 일본의 재래소를 개량하기 위한 유전자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일본의 한우 수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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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한우는 일본인에 의하여 많이 소비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이 발간한 조선지산우(朝鮮之産牛)에 따르면 “한우는 지방침착이 좋고, 일본 재래종보다 육질도 섬세하고 치밀하며, 상강도도 우수하다”라고 극찬할 정도로 일본의 소고기보다 한우가 훨씬 맛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지산우(朝鮮之産牛)


따라서, 일본은 자국의 소고기보다 한우를 더 즐겼으며,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통계연보에 따르면 매우 많은 수의 한우가 도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소 수급상황


다만, 조선보다 먼저 서구문물을 수용하면서 영국·미국·독일 등의 선진 위생제도를 도입하였던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의 육류유통과정은 전근대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교통과 냉장시설이 발달되지 않았던 탓에 전국 각지에 도축을 담당하는 포사(庖肆)가 산재하고 있었고, 1915년 통계에 의하면 조선의 도축장은 전국적으로 1,936개소에 이를 정도로 많았음에도 위생이나 시설기준과 관련된 명시적인 규정은 없었습니다.



이에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경성을 대상으로 육류도축관련법에 해당하는 도수규칙(屠獸規則)을 제정한 후 도축업에 종사하는 조선인의 이권을 빼앗고, 세금을 징수하기 위하여 일본은 아현동, 신설동의 관영도축장을 비롯한 현저동, 이태원의 사설도축장 등을 통폐합하고, 1917년 현저동에 경성부립도축장(京城府立屠畜場)을 설치하여 경성의 육류공급을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경성부립도축장(京城府立屠畜場)


또한, 일본은 전라남도 나주 등을 군수물자 거점으로 지정하여 소고기통조림공장을 설립하고, 그 공급을 나주도축장 등이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나주 다케나카(竹中) 소고기 통조림공장


하지만, 일본은 불교를 수용한 6세기 이후 지배층의 주도로 약 1200여년간 육식을 금기시하다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근대화과정에서 소고기를 먹기 시작하여 그 역사가 매우 짧았기 때문에 소의 살코기에서 내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위를 음식의 주재료 또는 부재료 등으로 다양하게 조리하는 방법을 알았던 우리 민족과는 달리 조리방법을 알지 못하여 버리는 부위가 많았으며, 특히 내장을 먹는 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여 먹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일본인과 일본의 침략에 협조한 소수의 조선인은 살코기 위주로 소고기를 먹었고, 이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경성, 평양 등의 대도시에서는 등심 등의 구이용으로 적합한 부위가 많이 소비되었습니다.


스키야키(すき焼き) 요리


이러한 사실은 당시 신문기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요.


1934년 동아일보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제일 맛있는 곳은 등심이고, 등심중에서 가장 가운데 부위의 맛이 특별하다”고 하였으며, 1937년 조선일보에 따르면 “제일 좋은 고기는 등심이고, 그 다음은 뱃살, 다리, 꼬리의 순이고, 제일 나쁜 곳이 머리고기”라고 하였습니다.


1934년 11월 3일 동아일보


그와 반대로 대다수의 서민은 일본의 각종 공출과 착취로 인하여 매우 가난하였으므로 소고기, 특히 살코기 부위는 접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이 먹지 않았던 내장부위 등의 부산물은 저렴하게 유통되었으므로 서민들은 주로 내장 등의 소의 부산물을 먹었으며, 적은 양으로도 많은 음식을 만들 수 있는 탕반문화(湯飯文化)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34년 4월 5일 조선일보 안석영 만평 '음식 배달부와 귀부인'


당시 교통과 냉장시설이 발전하지 않았으므로 쉽게 부패하는 부산물은 그 지역에서 소비하여야 했으므로 경성부립도축장이 있었던 경성에서는 설렁탕이, 소고기통조림공장이 있었던 나주에서는 곰탕이, 가축시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안성 등에서는 국밥 등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현재까지도 그 지역 대표메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나주곰탕과 서울설렁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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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소고기 분할의 한국사-선사시대 바로가기 : http://themeat.tistory.com/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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