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업/정육상식

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10편 1970년대 국외상황-2)

오늘도힘차게 2019. 12. 12.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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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돼지고기의 한국사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제10편 1970년대 국외상황-2)



1970년대 돼지 수출량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사회가 혼란스러웠으나, 냉전(Cold War)이 본격화된 이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군사특수(軍事特需)를 기화(奇貨)로 외화가 유입되면서 우리나라보다 먼저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국민소득의 증대로 돼지고기 소비량이 급증하게 되자 자국내 돼지고기 재고가 부족할 때에는 육류가격의 안정화를 위하여 상당한 분량의 돼지고기를 수입하였습니다.


일본의 연간 1인당 육류소비량 추이


당시 일본은 세계 최대의 돼지고기 수입국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으며, 미국, 캐나다, 중국, 호주, 우리나라 등 각국으로부터 돼지고기를 수입하였으나, 우리나라 돼지의 품질이 다른 나라에 비하여 크게 떨어지지 않았고, 양돈의 기후조건이나 고기 자르는 방식 등이 일본인의 기호에 부합하였으며, 지역적으로도 인접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은 우리나라의 돼지고기를 선호하였습니다.



게다가 1971년 일본에서 돼지고기가 수입자유품목으로 지정된 이후 우리나라의 돼지고기 대일수출량은 급격하게 증가하여 1970년 60톤(5.5만 달러)에 불과하던 대일수출량은 수입자유화 이후인 1972년에는 3,800톤(578만 달러), 1975년에는 8,100톤(2,185만 달러)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일본의 돼지고기 및 소고기 수입자유화 시기와 수입물량


그러다보니 한국과 일본 양국이 합작하는 시도들도 간간히 엿보였습니다.


1971년 7월 한일 양국은 경남 김해에 최신식 돈사를 도입하여 양돈사업을 시행하여 1972년부터 연 4,000마리 분량의 정육을 일본에 수출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고, 1972년 5월에는 소록도 국립병원과 일본의 육가공업체간에 생후 6개월된 돼지를 매월 4,000마리씩 수출계약을 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1972년 5월 20일 매일경제


하지만, 항상 대일수출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973년 11월 일본이 자국내 돼지고기의 재고누적과 돼지의 출하량 증가, 수출가격의 하락 등을 이유로 한국산 돼지고기에 대하여 특별관세를 부과하여 수입을 억제하기도 하였고, 대일수출량의 급증으로 국내 돼지고기 가격이 폭등하게 되는 바람에 우리 정부가 먼저 대일수출을 중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75년에는 일본의 돼지고기 재고부족으로 대일수출이 당초 수출목표보다 과잉수출되어 국내 돼지고기 공급량이 부족하게 되자 국내 돼지고기 가격이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소고기와의 가격격차가 점차 감소하여 소고기를 선호하던 식문화가 다시 부활하게 되었고, 1976년 구정을 전후하여 소고기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게 되면서 소고기 파동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정부는 소고기 파동을 해소하기 위하여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주 1회 무육일(無肉日)의 제정을 검토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시도하였습니다.


1976년 3월 19일 매일경제


하지만, 소고기의 품귀현상은 점차 심화되어 결국 호주와 뉴질랜드 등에서 소고기를 수입하는 결정을 하게 되었고, 1976년 8월 뉴질랜드 소고기 500톤이 인천항에 입하(入荷)한 이래 상당기간 소고기를 수입하게 되었습니다.


1976년 8월 26일 경향신문


이 과정에서 품귀현상을 빚은 소고기를 돼지고기가 대체하게 되면서 국내 돼지고기 소비량이 급증하게 되었으나, 대일수출이 중단된 사이 일본이 돼지고기 수입의 주 거래국을 한국에서 대만으로 변경하게 되어 대일수출은 한동안 표류하게 되었고, 그 사이 1977년부터 국내 돼지고기 공급량 부족 등을 이유로 1984년까지 대일수출은 장기간 부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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